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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이수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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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이수의 유래

전통적으로 순천은 ‘삼산이수’의 고장이라 일컫고 소강남(小江南)이라 자부해 왔다. 그래서 현재도 학교 이름을 그것으로 짓곤 한다. 그러나 왜 삼산이수의 고장이며, 소강남이라고 일컫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석연찮다. 어떤 문헌에도 이 물음에 한 대답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 또 삼산이수가 무엇을 지칭하느냐고 물으면 용당동에 있는 세 봉우리의 산을 삼산으로, 옥천과 동천을 이수로 지칭 한다. 혹자는 제산 원산 비봉산을 대기도 하고 혹자는 인제산 해룡산 진례산을 일컬으며, 동천과 이사천을 이수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연만하고 한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이백(李白)의 삼산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지고, 이수는 백로 섬에서 나뉘어 흐르네 라는 시를 인용해서 중국의 강남 경치와 같이 뛰어나기 때문에 소강남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 흔히 있다. 한문을 많이 알고 모화 사대사상 에 젖었던 사람들 이 살던 곳에는 이처럼 중국의 산이나 강, 마을의 이름들이 그대로 우리의 자연 경치에 붙여진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송광면 대곡리에서는 절강성(折江省)의 엄자릉(嚴子陵)이 숨어 살던 부춘산(富春山) 경치와 비슷하다 고 보성강(현지의 이름은 동강) 기슭의 산을 부춘산이 라부른다. 그러나 자고로 순천에 삼산삼호신인(三山三護神人)이 있다고 구전한다. 세 산에 순천을 호하는 세 신인이 있다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인물편을 보면 후백제 김총은 견훤 아래에서 벼슬을 하여 벼슬이 인가별감에 이르렀고 죽어서 순천부의 성황신이 되었다. 고려 박영규는 후백제 왕 견훤의 사위이다 …… 고려왕이 좌승의 벼슬을 하사하고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죽어 해룡산신이 되었다.박난 봉은 죽어서 인제산신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성황신 김총, 해룡산신 박영규, 인제산신 박난봉이 세 수호신이고 이 신인들이 머물러 있는 산이 삼산일 것이다. 그러므로 삼산은 삼호신인의 사당이 있는 산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사묘(祠廟)편에 서술한 대로 성황사(城隍祠)는 진례산 (進禮山, 여천시 상암동)에, 해룡산사(海龍山祠)는 해룡산(홍내동)에 있었으며, 박난봉의 사당은 인제산에 있었다. 그러므로 삼산은 해룡산 진례산 인제산이다. 해룡산에는 산사터가 있는데, 문충섭(文忠涉)의 말에 따르면 그 산에 있는 토성 터가 견훤성이라고 한다. 순천여상정문에서 바라보면 토성이 훤히 보인다. 1970년대까지도 오산 뒤 정상에는 토기편이 나뒹굴었고 그 정상을 기점으로 성의 잔해가 통천마을과 금성마을로 뻗쳐 있었다. 통천마을 사람들은 성 안에 있는 밭을 지금도 ‘서안밭’이라고 부른다. 1910년대에 기술했을 조준섭의 망월 정기(望月亭記) 가 『승평속지』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오산 뒤에 망월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이 경상북도 상주 사람이라고 학계에 통설로 되어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순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광주의 북촌 사람으로 지렁이 탄생설화를 말하기도 하지만, 홍내동 대룡동 일대 주민들은 지렁이 탄생설화를 이 해룡산성에 바탕을 두고 구연한다. 그리고 순천의 읍호 (邑號) 가운데 사평 무평 모평들의 명칭이 있는데 교량동에 있던 사평 또는 무 평(사라호 태풍으로 유실)마을이 읍호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3/10/29 14: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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